열왕기서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단연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에, 그토록 위대한 선지자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단 한 번도 다윗과 견줄만한 선한 왕의 통치가 없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마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후, 여로보암 2세 시대 북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한 중흥기를 맞이한 것은 그 이전 엘리야와 엘리사가 일으킨 영적 부흥의 열매입니다. 엘리사가 죽을 때, 요아스가 울면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한 것은 참으로 진실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살아있는 동안에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 버렸을 때, 시체가 회생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영적으로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던져 버리기를 즐겨 하지 않고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엘리사와 같은 인물이 존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지난 15년 정도 청년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낙심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가르쳐도, 잠간 돌아서면 배신하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나 자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이렇게 열매도 별로 보이지 않는 일에 제 인생을 허비하라고 저를 부르셨습니까?”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확실한”(?) 응답을 안 주십니다. 아니, 제가 기대하는 “강한 바람 같고 지진 같고 불같은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세미한 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세워 이스라엘의 영적인 암흑기를 뚫고 나갈 믿음의 세대를 일으킨 것처럼,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일을 지속하라”는 그 음성 말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중에 하나님께 세 가지 사명을 받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자신의 선지자직을 계승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자신의 시대에 엘리사를 선
우리 시대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먹고 잘 사는데, 정작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어려움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채 그저 여가활동의 일부로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극단까지는 가지는 않아도,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고난이 있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굳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뭔가’라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이런 회의적 시각에서 욥을 본다면, 욥은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켜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욥의 부인이 악하게 쏟아낸 말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그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시고, 그의 기도에 귀를 닫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킵니다. 항변하고, 불평하고, 자신의 결백과 불의한 현실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혜이며
욥의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공감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심지어 그들이 욥보다 내 생각을 더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사실 오늘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늘 정답만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입바른 충고는 잘도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경청하는 능력은 부족한, ‘정통 그리스도인’의 모습 말입니다. 욥처럼 뜻 모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공감입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해 줄 누군가가 정말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아 믿음조차 흔들리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그냥 가만히 어깨를 다독여주며 함께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 그러면 안 된다’ ‘이래야한다’는 섣부른 충고와 조언을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말들을 위로랍시고 너도나도 건넬 때 듣는 사람은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무게만도 힘든데, 그런 말들 때문에 상처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는 현실이 ‘정답’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바울과 아볼로는 인간적으로 보면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아볼로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선임자고, 아볼로가 후임자입니다. 그런데 바울보다 아볼로가 더 주목을 받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는 학문이 높고 수사에 능했으며 구약성경에도 능통했던 반면, 바울은 비록 학문은 뛰어났지만 일부러 그리스식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언변도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수사법에 익숙한 헬라인들에게도 아볼로가 훨씬 잘 먹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볼로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시대에 속한 관점에서 복음을 알았지, 성령 강림 이후 새 시대의 관점에서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복음을 더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를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조금도 라이벌 의식을 갖거나 질투하거나 깎아 내리지 않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광야에서 말씀으로 서고 광장에서 말씀으로 살라!" 2017년 일원동교회의 표어입니다.광야와 광장, 어찌보면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아주 상반된 곳입니다. 광야는 고독하게 홀로 주님과 직접 대면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광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터와 직장, 문화와 경제와 정치를 다루는 곳,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모든 일상적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 곳 중 그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니, 포기해서는 안됩니다.광야 속에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광장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의 성도들과 아덴에서의 바울은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광야에서 말씀으로 서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그저 소비하는 청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말씀을 받거나, 말씀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며 씨름했습니다. 누가 일일이 떠먹여 주지 않아도 스스로 말씀을 찾아 먹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광야에 서는 것 같은 고독한 일입니다. 분주한 삶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끝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자칫, 하나님의 뜻을 놓쳤다가는 낭패를 당하고 인생이 추락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싸여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무한한 자유를 줍니다. 복음을 받고 성령 안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어떤 선택이든지 담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가 채택한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자유를 허용하고,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공문은 ‘너희가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는 인사로 마무리됩니다. 율법에 얽매여 이런 저런 규제를 받지 않더라도, 복음의 자유 안에서 스스로 삼가고 행하는 이들에게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유의 선물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도들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따라 행했던 모든 선택들이 결국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다
바울은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호응과 맹렬한 비난을 동시에 받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뉩니다. 복음의 빛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과 어둠 속에 머물며 복음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들입니다. 믿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반대편의 공격도 더욱 거세어지는 것을 봅니다. 복음 전도자로서 바울의 인기와 명성은 바울에 대한 시기 질투와 항상 비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의 반응에 그리 흔들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비난과 모욕을 당하고, 거센 위협과 죽음의 위험에까지 처해도 바울은 훌훌 털고 일어나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대적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가해올 때는 낙심해 주저앉을 법도 한데, 바울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난과 공격으로 상처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고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는 바울의 모습에서, 그의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찬사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신이라 칭송하며 숭배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공부의 신’이니, ‘직장의 신’이니 무슨 ‘여신’이니.
고후 9:6-8 "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 교회에는 오랫동안 ‘축복의 복음’이 번성했습니다. 많은 기도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고, 많은 봉사를 하면,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 세상에서 성공하고, 물질적으로도 번성한다는 논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고 희망이 없었던 시절에 축복의 복음은 큰 매력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복 받고 잘 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면서, 성장의 큰 동력을 얻었습니다. 얼핏 보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심음과 거둠’의 원리는 한국 교인들에게 익숙한 축복 신앙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씨를 적게 뿌리면 수확을 적게 거두고, 아낌없이 많이 뿌리면 많은 수확을 얻는 것처럼, 헌금도 아낌없이 많이 드리는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마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되십니다(22:13). 그 분 안에서 어두운 밤이 물러가고 광명한 새벽별이 비추어 새로운 날이 찬란하게 밝아 옵니다(22:16). 그러므로 종말은 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해피엔드로 이야기가 끝맺어지는 것과 동시에, 가장 위대하고 흥미진진한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C. S. Lewis는 그의 유명한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편인 <최후의 전투>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나기 시작한 일들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그것들을 쓸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은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며, 우리는 그들 모두가 그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모든 삶과 나니아에서 그들의 모든 모험은 책 표지와 속표지에 해당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제 마침내 그들은 이 땅의 그 누구도 읽은 적 없는 <위대한 이야기 제 1장>을 시작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되며,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